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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해 12월 14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 일대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 집회에 나온 시민들이 음악에 맞춰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21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됐다. 암울했던 불법 계엄의 밤 이후로 시민들은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에서 무소불위 대통령을 탄핵했다. 농민, 노동자, 여성, 청소년, 장애인 시민이 민주주의 한 챕터를 넘겨서 시작된 선거인지라 감개무량하다. 그런데 대선의 면모를 보면 모두 착각인가 싶다. 시민주권이 만개한 광장이 아니라, 광장을 닫고 기억을 봉인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의사는 후보자별 지지율 숫자가 되어 꼬리표로 나부낀다. ‘민주주의 난세 영웅’인 후보자와 ‘팬덤’이 되어야 마땅한 시민으로 역할이 나뉜 것 같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게 민주주의의 회복이라고 압박받는 느낌이다. 광장은 평평하고 다채롭고 와글와글했는데, 대통령 선거는 극도로 납작하고 건조하다. 국민의힘 경선과 단일화를 둘러싼 이합집산이 상위권 ‘팝콘 각’ 콘텐츠였던 정도다. 이는 국민의힘의 자승자박이 흥미진진해서겠지만, 그보다 더 칼칼하고 달달한 감동이 대선에 있지 않아서가 아닐까. ‘팝콘 각’으로 감상하는 시청자 이상 주권자로 존재할 여지가 대선에 없어서는 아닐까.

이기기 위해 성평등 공약 희석시켰나

시민주권주의가 닫힌 모습은 정책 논의가 사라진 점에서도 볼 수 있다. 대통령 후보 정당별 10대 정책에서 성평등·여성 정책을 유심히 살펴봤다. 더불어민주당은 1990년대부터 여성정책을 항상 발표해왔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공공부문 여성할당제, 여성정책 담당 부처 신설을 제시했고, 16대 대선에선 ‘양성평등 사회’를 제안했다. 18대 대선은 ‘국민 모두가 행복한 복지국가와 성평등 사회’, 19대 대선은 ‘지속가능하고 성평등한 대한민국’이 제안됐다. 17대 대선에서는 100개의 여성 공약, 20대 대선에서는 여성 대상 공약이 공약집에서 별도로 제시됐다.

그런데 2025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공약집에 성평등, 젠더가 없다. 정책 분야 차원 중 하나로도 없고, 단어도 없다. 공약의 세부 과제를 살펴보면 교제폭력 범죄 처벌 강화와 피해자 보호명령제도 도입, 고용평등 임금공시제 도입과 공공기관 성별 평등지표 반영, 한부모가족 복지급여 확대, 돌봄·교육과 일·가정 양립 지원 강화 등이 있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묻지마 이상동기 범죄 처벌 강화’가 있는데 이 정책이 최근 일어나고 있는 여성 대상 비면식범에 의한 혐오 범죄에 대응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관점도 분석도 애써 탈각한 문구이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1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10대 정책공약 기자간담회에서 이한주 총괄선거대책본부 정책본부장(왼쪽 다섯째)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은 이번 대선에서 굳이 논쟁거리를 만들지 않고 무난한 승리를 하는 ‘로키’(Low-key) 전략을 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책 논쟁은 한국 사회의 현실적 지형을 드러낸다. 인식의 차이는 여건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를 분석하여 명확하게 확인하고, 불평등한 조건을 조정하고 시대에 맞게 필요한 정책을 도출하여 현실을 개선하는 게 정치의 몫이다. 논쟁 과정에서 시민주권이 교차하면서 등장하고 제구실을 할 수 있다.

소수자와 여성이 연대했던 광장

그런데 ‘함구령’은 이를 멈춰버린다. 대통령 후보를 아무런 ‘리스크’ 없이 당선시키기 위해서 모든 시민이 자기 삶이 걸린 의제에 대해 함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게 한다. 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커뮤니티를 보면 구설에 오를까 봐 서로를 단속하고, 단속하라는 말이 구설이 될까 봐 또 단속한다.

나아가 함구령은 정책이나 의제에 입을 다무는 이유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으로까지 이어진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성평등 정책이 왜 없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여성본부 관계자가 “광장에서 만난 2030 여성들은 본인을 챙겨달라고 하지 않고 장애인이나 소수자 등에 관한 평등의 가치를 말했다”고 대답했다. 이런 답변은 여성 정책도, 소수자 정책도 발표하지 않는 현실을 ‘여성과 소수자가 연대했던’ 광장에서 찾는 난센스를 만들어낸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 선대위가 성평등 정책을 함구하는 동안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첫번째 장에 기술했다. 친민주당 성향으로 분류되는 유튜버 김용민은 최근 소셜미디어에 민주당 여성위원장을 호명하며 ‘가만히 있으라’는 함구령을 응용 재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정책과 공약은 사회적 논의와 숙의의 시작이다. 대통령 선거 공약은 의제의 변천사를 기록하는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성평등 과제는 역사적으로 필요성이 사라졌는가? 후보의 무난한 당선을 위한 정책 삭제와 함구령은, 혐오와 조롱 정치를 방치할 뿐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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