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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챗GPT
사석은 두 종류다. 하나는 죽은 돌(死石), 다른 하나는 버림 돌(捨石)이다. 버림 돌도 죽음을 맞이한 점에선 죽은 돌과 같지만 실제로는 크게 다르다. 죽은 돌은 판을 떠난다. 설령 남아있더라도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 버림 돌은 판 위에 존재하며 계속 영향력을 행사한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버림 돌은 천차만별의 가치를 띤다. 그러므로 돌을 버려 대세를 얻는 사석전법은 지극히 고단수의 전법이다. 바둑의 신이 된 인공지능(AI)이 가장 선호하는 전법이기도 하다.

정치판에서도 사석전법은 종종 등장한다. 대통령 선거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이 그것이다. 국민의 힘 경선은 처음 4명을 뽑고 다시 2명으로 압축하더니 마지막 한 명으로 김문수를 뽑았다. 그 와중에 다수의 버림 돌이 만들어졌다.

사실 버림 돌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가장 꼭대기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림 돌로 삼은 순국선열이 존재한다. 때로는 밀알이 되고 때로는 불쏘시개가 되는 버림 돌의 이야기는 가슴 아프지만 따뜻하게 주변을 감싼다. 이런 상황을 바둑용어로는 “주변이 두터워졌다”고 한다. 바둑이든 정치든 두터움은 힘이다. 경선은 곧 이런 효과를 기대하는 거라 할 수 있다.

한덕수 전 총리가 대선에 등장하면서 바둑판에 돌연 모호함과 분노가 교차하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의 ‘바둑 두는 사람들’은 진즉부터 한덕수로의 단일화라는 더 큰 사석전법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다. 김문수는 물론이고 나경원·안철수·한동훈·홍준표 등 경선 참가자들은 모두 화가 났다. 자신들이 조종당하고 이용된 바둑돌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경선에서 져도 명분 있는 버림 돌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처음부터 죽은 돌에 불과했다. 자신들과 달리 고공으로 날아온 한덕수라는 대마는 어떤 존재인가. 그 뒤에 누가 있는 것일까. 분위기는 그림자가 드리운 듯 어둑어둑했지만 대세는 한덕수 편이었고 그 흐름은 뒤집을 수 없어 보였다.

후보 등록 시한이라는 초읽기에 몰린 국민의힘의 ‘바둑 두는 사람들’은 한밤 기습을 감행했다. 김문수에서 한덕수로 후보를 교체하려 했다. 단일화 약속을 회피하는 김문수를 내치고 한덕수를 옹립하는 경천동지의 초강수를 뒀다. 막을 자가 없어 보였다. 이런 이상한 일도 현실이 되는구나 싶었다. 바둑의 고수들은 극단적 수법을 싫어한다. 상대의 묘수가 겁나기 때문이다. 병법에도 상대를 쫓을 때는 퇴로를 열어주고 쫓으라 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밤의 기습은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누군가 묘수를 두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묘수가 등장했고 그로 인해 절체절명의 벼랑 끝에 몰렸던 김문수가 살아났다. 바둑에 “묘수는 ‘1의 2’에 있다”는 격언이 있다. 바둑판은 종횡 19줄씩이고 361개의 교차점이 있다. ‘1의 2’란 1선과 2선이 교차하는 바둑판 좌표를 말한다.

1선은 사선(死線)이다. 돌이 그곳에 가면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2선은 패망선이다. 바둑돌이 그렇게 낮은 곳으로 기어 다니면 대세를 잃고 패망하게 된다. 격언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활의 묘수가 이 둘의 교차점 어딘가에 숨어있다고 말한다. 묘수란 안전한 곳에 있지 않고 죽음과 패망이란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야 얻을 수 있다.

벼랑 끝의 김문수를 구원한 이번 묘수도 마찬가지다. 묘수의 주인공은 국민의힘 당원들인데, 그들이 당 비상대책위원장이나 당 대표, 유력 국회의원에 맞서 반대표를 던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원들은 이번 거부 투표를 통해 국민의힘의 ‘바둑두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통보한 셈이다. “당신들은 바둑 두는 대국자가 아닙니다. 바둑돌입니다. 바둑은 우리가 둡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바둑돌이 아닌 바둑 두는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조금 떨어져서 보면 우리는 모두 다 바둑돌이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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